
일라이자, 목소리를 잃은 청소부가 나눈 침묵의 언어
기예르모 델 토로가 연출한 이 작품은 1960년대 냉전 시기 미국의 비밀 연구소를 배경으로, 어릴 적 사고로 목소리를 잃고 수화로만 소통하는 청소부 일라이자가 그곳에 감금된 정체불명의 양서인과 서서히 교감을 나누는 과정을 그린다. 샐리 호킨스가 연기하는 일라이자는 대사가 거의 없는 배역임에도 표정과 몸짓만으로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전달하며, 그녀가 매일 반복하는 단조로운 일상, 즉 계란을 삶고 목욕을 하며 자위를 하는 장면들은 그녀가 오랫동안 외로움 속에 갇혀 지내왔음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처음 연구소에서 사슬에 묶인 채 고통받는 양서인을 발견하고 연민을 느끼며 몰래 삶은 계란을 건네는데, 이 사소한 호의가 말이 통하지 않는 두 존재 사이에 서서히 신뢰를 쌓아가는 계기가 된다. 두 사람은 이후 수화와 음악, 몸짓만으로 감정을 나누며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영화는 이 관계를 기괴하거나 이질적인 것으로 다루지 않고 오히려 언어를 초월한 순수한 소통의 형태로 그려낸다. 일라이자가 이웃에 사는 화가 자일스와 청소 동료 젤다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걸고 양서인을 연구소에서 탈출시키는 계획을 세우는 전개는,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이 서로 연대해 거대한 권력에 맞서는 이야기로 확장되며 이 영화가 단순한 러브스토리를 넘어선 사회적 함의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라이자가 매일 아침 알람 대신 삶은 계란을 준비하며 시작하는 규칙적인 일과와, 버스를 타고 출근해 야간 근무를 반복하는 삶의 리듬은 그녀가 사회에서 존재감 없이 스쳐 지나가는 인물로 취급받아왔음을 담담히 드러내며, 이러한 익명성이야말로 오히려 그녀가 편견 없이 낯선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로 작용한다. 흑인 여성인 젤다와 동성애자인 화가 자일스가 각자의 방식으로 소외를 경험해온 인물이라는 설정 역시, 이 영화가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난 이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연대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음을 뒷받침한다. 자일스가 젊은 카페 점원에게 느끼는 짝사랑이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고, 시대의 편견 때문에 자신의 예술적 재능마저 인정받지 못하는 모습은 일라이자의 처지와 은근히 겹쳐지며, 두 사람이 서로를 유일한 가족처럼 의지하게 되는 이유를 자연스럽게 설명해준다. 일라이자가 흑백 뮤지컬 영화를 즐겨 보며 대사 없는 화면 속에서도 감정을 온전히 읽어내는 취향을 지녔다는 설정은, 그녀가 언어를 넘어선 소통에 이미 익숙한 인물이었음을 은근히 암시하는 세심한 복선으로 기능한다.
냉전 시대 실험실에 갇힌 양서인, 두려움의 대상이 된 존재
더그 존스가 특수분장을 통해 연기한 양서인은 아마존에서 신처럼 숭배받던 존재였으나 미군에 의해 포획되어 우주 경쟁에서 소련을 앞서기 위한 실험 대상으로 전락한 인물로 설정된다. 마이클 섀넌이 연기하는 냉혹한 보안 책임자 스트릭랜드는 이 생명체를 오직 군사적 이용 가치로만 바라보며, 고문에 가까운 실험을 반복하고 결국 해부를 통해 완전히 죽여 없애려는 계획을 세운다. 영화는 이 양서인을 괴물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보다 더 섬세한 감정을 지닌 존재로 묘사하는데, 그가 일라이자가 틀어주는 재즈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거나 그녀가 건넨 계란을 조심스럽게 받아먹는 장면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누가 진짜 괴물인지 자연스럽게 되묻게 만든다. 냉전이라는 시대적 배경은 이 작품에서 단순한 무대 장치를 넘어, 타자에 대한 공포와 배타적인 국가주의가 극에 달했던 시기에 인간이 아닌 존재를 향한 폭력이 얼마나 정당화되기 쉬웠는지를 은유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특히 실험실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인체 실험 장면들과 소련 스파이로 위장한 과학자 호프스테틀러가 오히려 양서인을 살리기 위해 애쓰는 전개는, 이념 대립이라는 거대한 서사 속에서도 개인의 양심과 연민이 여전히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읽힌다. 이러한 설정들은 이 영화가 화려한 판타지 로맨스의 외피 아래 냉전기의 편견과 폭력을 정교하게 비판하고 있음을 뒷받침한다. 스트릭랜드가 자신의 성공과 승진을 위해 양서인을 반드시 죽여야 할 대상으로 몰아붙이면서도, 정작 가정에서는 위선적인 가부장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설정은 그가 상징하는 권위주의가 얼마나 이중적이고 공허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함께 드러낸다. 더그 존스는 무거운 특수분장 속에서도 눈빛과 미세한 몸짓만으로 양서인의 감정을 표현해냈으며, 이는 관객이 이 낯선 존재에게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진정한 공감을 느끼게 만드는 결정적인 연기적 성취로 꼽힌다. 호프스테틀러가 결국 자신의 신념 때문에 두 진영 모두로부터 배신자로 몰리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전개는, 냉전이라는 이념 대립 구도 속에서 개인의 양심이 설 자리가 얼마나 좁았는지를 씁쓸하게 증언하는 대목으로 남는다. 실험실 내부를 지배하는 삭막한 형광등 조명과 금속성 세트 디자인은 인간이 자연의 신비로운 존재조차 통제와 효율의 대상으로만 취급하려는 냉전기 과학주의의 폭력성을 시각적으로 압축해서 보여주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물이 되는 순간, 스트릭랜드가 끝내 이해하지 못한 사랑의 형태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물이라는 모티프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이미지로, 델 토로 감독은 일라이자의 아파트가 극장 위층에 위치해 늘 습기와 물이 스며드는 공간으로 설정하는 등 시각적으로 물의 이미지를 반복해서 배치한다. 일라이자가 욕조를 물로 가득 채우고 문틈으로 물이 흘러넘치는 장면에서 양서인과 사랑을 나누는 시퀀스는, 이 영화가 서로 다른 존재 간의 사랑을 다루면서도 그것을 은유적이고 시적인 언어로 승화시키려 했음을 보여준다. 스트릭랜드는 시종일관 힘과 통제, 남성성을 과시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그는 손가락 두 개가 잘려나가는 부상을 입고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양서인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자 반드시 제거해야 할 위협으로만 인식한다. 그가 상징하는 것은 다름을 포용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세계관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폭력적인 권위주의로, 영화는 그를 통해 사랑과 이해보다 두려움과 지배를 우선시하는 태도가 얼마나 파국적인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준다. 결말에서 스트릭랜드의 총에 맞아 죽어가던 일라이자가 양서인의 치유 능력으로 되살아나고, 목 주위의 흉터가 실은 아가미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그녀 역시 물의 존재로서 그와 함께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결말은, 언어가 아닌 존재 자체로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랑의 완성을 판타지적으로 형상화한다. 이 작품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며 장르 영화가 지닐 수 있는 예술적 깊이와 사회적 메시지를 동시에 증명한 사례로 평가받았다. 알렉상드르 데스플라가 작곡한 몽환적인 음악과 초록빛과 청록빛이 감도는 프로덕션 디자인은 이 작품 전체를 마치 물속에 잠긴 동화처럼 느껴지게 만들며, 델 토로 감독이 오랫동안 애정을 표해온 고전 괴수 영화에 대한 오마주를 세련된 성인용 동화로 재해석해냈다는 평가로 이어진다. 자일스가 극 말미에 이야기를 정리하며 들려주는 나긋한 내레이션은 이 모든 사건이 한 편의 오래된 동화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임을 암시하며 영화 전체에 신화적인 여운을 더한다. 물속에서 서로를 끌어안은 두 사람의 몸이 부드럽게 흔들리는 마지막 쇼트는 마치 오래된 회화 작품을 보는 듯한 정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내며, 폭력과 편견으로 가득했던 현실을 벗어나 온전히 서로만 존재하는 공간에 도달했다는 정서적 해방감을 시각적으로 완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