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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 리뷰 - 웃음을 강요받던 한 남자가 광대 분장 아래 도시를 뒤흔들기까지

by 희망의 나라 2026. 9. 20.

아서 플렉, 억지웃음의 병을 앓는 광대의 하루

토드 필립스가 연출한 이 작품은 1980년대 초 쓰레기 파업으로 도시 전체가 악취와 혼란에 휩싸인 고담을 배경으로, 파티 광대로 일하며 스탠드업 코미디언을 꿈꾸는 아서 플렉이 서서히 조커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하는 아서는 뇌 손상으로 인해 감정과 무관하게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뜨리는 병을 앓고 있으며, 이 병으로 인해 버스 안에서 아이를 웃기려던 순수한 행동조차 주변 사람들에게 조롱과 폭력의 빌미가 되는 상황을 반복적으로 겪는다. 그는 정신질환을 앓는 어머니 페니를 홀로 부양하며 상담 치료와 약물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티지만, 시 예산 삭감으로 상담 프로그램이 중단되면서 그를 지탱해주던 마지막 사회적 안전망마저 사라지고 만다. 지하철에서 자신을 조롱하던 월가의 젊은 직장인 세 명을 총으로 쏴 죽이는 사건은 아서에게 있어 처음으로 자신이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는 감각을 느끼게 해주는 전환점이 되며, 이후 이 사건이 언론을 통해 부유층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소비되면서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도시 전체를 뒤흔드는 운동의 얼굴이 되어간다. 호아킨 피닉스는 이 배역을 위해 체중을 극단적으로 감량해 앙상한 몸을 만들었고, 억지웃음이 고통스럽게 뒤틀리는 표정과 기이한 춤사위로 아서의 내면에 쌓인 광기를 신체적으로 표현해내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아서가 좁은 아파트에서 홀로 냉장고 안에 몸을 숨기거나 창밖을 응시하며 시간을 흘려보내는 장면들은 그가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왔음을 담담히 축적해 보여주며, 그가 일기장이자 농담 노트에 써 내려가는 삐뚤빼뚤한 문장들은 정신이 무너져가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누군가에게 웃음을 주고 싶어 하는 순수한 열망이 남아 있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옆집 이웃 소피와의 관계를 상상 속에서 부풀려가는데, 이후 이 모든 장면이 실은 그의 망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영화는 관객이 지금까지 지켜본 서사 자체가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 것이었는지를 되묻는다. 이러한 신뢰할 수 없는 화자로서의 아서라는 설정은 이후 그가 겪는 사건들 역시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어디부터가 망상인지 관객이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들며, 영화 전체를 단순한 인과관계로 설명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 인간의 붕괴된 내면을 통과하는 주관적인 체험으로 재구성한다.

머레이 프랭클린 쇼, 웃음거리가 되기를 거부한 순간

아서에게 있어 인기 토크쇼 진행자 머레이 프랭클린은 오랫동안 선망해온 존재로, 그는 자신이 언젠가 이 쇼에 출연해 코미디언으로 인정받는 상상을 반복하며 고단한 현실을 견뎌왔다. 그러나 그가 어렵게 도전한 스탠드업 공연에서 긴장 탓에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리며 무대를 망치자, 머레이는 그 영상을 방송에 내보내며 아서를 조롱거리로 소비하는데, 이 사건은 아서가 오랫동안 지녀온 희망을 완전히 배신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설상가상으로 아서는 자신이 오랫동안 친아버지라 믿어왔던 부유한 사업가 토마스 웨인이 사실 자신과 혈연관계가 없으며, 어머니 페니가 망상장애를 앓고 있었다는 진실까지 마주하게 되면서 자신이 지탱해온 정체성의 마지막 조각마저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아서가 광대 분장을 완성하고 머레이의 쇼에 초대되어 방송에 출연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실질적인 클라이맥스로, 그는 더 이상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생방송 도중 자신의 살인을 고백하고 결국 머레이를 총으로 쏴 죽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이 장면에서 아서가 사회는 나 같은 사람을 완전히 무시해놓고 아무런 예의도 없는 존재로 취급했다고 절규하는 대사는, 이 영화가 개인의 광기를 넘어 사회 전체가 소외된 이들을 방치한 결과로서의 폭력을 다루고 있음을 명확히 드러낸다. 방송 중계된 살인 장면은 이후 도시 전역에서 광대 가면을 쓴 폭도들이 봉기하는 도화선이 되며, 개인의 비극이 사회적 혼돈으로 확산되는 결정적인 전환점을 만들어낸다. 어머니 페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병상에서 숨을 거두는 장면에 이르러서야 아서는 그동안 자신이 진실이라 믿어온 가족사가 철저히 조작된 망상이었음을 완전히 받아들이게 되고, 이 상실의 순간이 오히려 그를 옭아매던 마지막 애착을 끊어내며 조커로의 완전한 변모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된다. 아서가 자신을 오랫동안 무시해온 직장 동료 랜들을 살해하면서도 자신에게 유일하게 다정했던 동료 게리만은 살려 보내주는 장면은, 그가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신만의 왜곡된 도덕적 기준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섬뜩한 디테일이다. 방송국 대기실에서 자신의 출연 순서를 기다리며 초조하게 서성이던 아서가 점차 차분한 확신으로 표정을 바꿔가는 짧은 시퀀스는, 그가 방송에 나가는 순간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마음속으로 완료했음을 대사 없이도 관객에게 전달하는 섬세한 연출로 평가받는다.

고담의 계단, 춤으로 완성되는 조커의 탄생

영화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좁고 가파른 계단은 아서가 힘겹게 하루하루를 오르내리는 고단한 일상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기능하다가, 그가 완전히 조커로 각성한 이후에는 자유롭고 리드미컬한 춤을 추는 해방의 무대로 의미가 완전히 뒤바뀐다. 아서가 게리 글리터의 록 앤 롤 파트 투에 맞춰 계단을 내려오며 춤을 추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로 꼽히는데, 억눌려 있던 존재가 사회적 규범을 완전히 벗어던지고 스스로 창조한 정체성으로 거듭나는 순간을 시각적 카타르시스로 완성한다. 힐데어 구드나도티르가 작곡한 첼로 중심의 음산한 스코어는 아서의 심리적 붕괴 과정을 청각적으로 따라가며, 영화 전체에 걸쳐 점점 고조되는 불안과 긴장을 정교하게 축적해나간다. 감독은 이 영화를 마틴 스코세이지의 택시 드라이버나 코미디의 왕 같은 1970년대 뉴욕 영화들의 화법을 빌려와 구성했는데, 화려한 슈퍼히어로 영화의 문법을 배제하고 대신 한 인간의 심리적 붕괴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사회파 드라마의 형식을 택했다는 점에서 기존 코믹북 영화들과 뚜렷하게 구별된다. 결말에서 아서가 정신병원에서 상담사와 나누는 대화 중 문득 자신이 무엇을 웃고 있는지도 모른 채 웃는 모습으로 영화가 끝나는 것은, 그의 광기가 완전히 해소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 안에 여전히 잠재된 형태로 남아 있음을 암시하는 열린 결말로 해석된다. 이 작품은 개봉 당시 폭력을 미화한다는 논란과 사회 비판적 통찰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받으며 슈퍼히어로 장르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극 중반 아서가 어린 시절 자신을 학대했던 어머니의 남자친구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스스로도 웃음병의 근원이 학대로 인한 트라우마였음을 깨닫는 대목은, 그의 폭력성이 어느 한순간의 광기가 아니라 오랜 세월 누적된 방임과 폭력의 결과물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로 기능한다. 토마스 웨인이 훗날 배트맨이 되는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관객에게, 아서와 웨인 가문의 얽힌 인연은 이 이야기가 결국 하나의 거대한 신화 속 대립 구도의 기원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은근히 환기시킨다. 극 중 웨인 부부가 결국 폭도들에게 살해당하며 어린 브루스가 골목에 홀로 남겨지는 장면을 짧게 삽입한 연출은, 한 인물의 절망이 낳은 폭력이 훗날 또 다른 상처받은 아이를 통해 되풀이될 것임을 암시하며 이 어두운 이야기에 씁쓸한 순환의 여운을 덧붙인다.